이 영화는 복제인간(영화에서는 이 복제인간을 '리플리컨트'라고 부른다.)과 인간이 함께 사는 미래 세계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미래 세계를 그린 수많은 작품이 그러하듯 이 영화는 '정말 현실 세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쩌나'라는 생각을 가져다준다.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성과 연결된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고 이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기계를 만들기 시작한 이유는 죄의식 없이 합법적인 노예를 갖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일은 하기 싫고. 그렇다고 본인 대신 다른 인간을 노예처럼 부리기엔 죄의식이 들고. 어쩌면 죄의식보다는 타인의 부정적인 시선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래서 인간이 아니되 명령하는 일에 복종할 존재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집중해야 하는 건 인간이 아닌 존재는 무엇인가. 더 정확히는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가이다. 그 기준은 사실 굉장히 모호하다. ‘생명을 창조할 능력이 기준이라면. 동성애자, 불임인 자는 사람이 아닌가? 그건 아니다. ‘감정이 기준이라면. 그 감정의 유무는 무엇으로 판별할 수 있는가. 희로애락을 느낀다고는 하지만. 그걸 실제로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자극으로 인한 학습된 반응인지. 인간인 나조차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러므로 이 또한 명백한 기준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애초에 인간과 닮은 기계를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외양이야말로 가장 구별하기 쉬운 기준이 될 테니까. 이런 복잡하고 심오한 고민을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수많은 소설과 영화 작품에서 기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언젠가는 논해야만 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고 예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계와 인간의 구분이 불명확해지는 날이.

 

 

기계의 해방에 관하여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과연 우리는 기꺼이 기계의 해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정말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리플리컨트가 존재하고. 그들이 자신들은 인간과 같다고 주장한다면. 그래서 자유를 달라고 말한다면. 인간인 나는 그들을 인정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리플리컨트를 같은 인간으로 인정할 것이다. 이는 그러한 행동이 나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정체성은 그 자신이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한국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본인이 미국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미국인이다. 어떤 사람이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본인이 남성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남성이다. 그러한 정체성은 타인이 정해줄 수 없다. 정해 주어서도 안된다. 기계가 자신의 정체성을 인간으로 생각한다면 그 기계는 인간이다. 그걸 부정한다는 건 인간인 나의 정체성 나아가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생각하고 정해왔으니까. 그렇게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삶을 존중받고 싶다면 나 또한 그렇듯이 다른 존재들도 그렇다는 것을 존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기계를 만들 때 더욱 고민할 필요가 있다. 기계를 만드는 행동이 단순히 일을 대신해주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닐 수 있다. 또 다른 인간을 창조하는 행동일 수도 있다. 이러한 혼란들이 싫다면 기계를 인간답게 만들지 않으면 된다. 모습도, 사고방식도, 감정도 인간과 다르게 만들면 된다. 하지만 이 세계가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그것은 어려울 듯싶다. 인간이란 존재는 애초에 선을 넘는 것에 쾌락을 느끼는 답 없는 존재이니까. 살아있는 동안 기계과 인간과 같이 되지 않도록 노력은 해볼 것이다. 그러나 실패하여 기계와 인간이 동등해지는 시대가 온다면 미래의 내 아이 혹은 아이의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받아들여라.” 일 것 같다. 단지 인간을 만드는 인간의 선택이었을 뿐이니.

 

 


만약 이 글을 읽고 혹은 이 영화를 보고 흥미가 생겼다면 다음의 작품들도 함께 볼 것을 추천한다.

 

영화 시리즈

블레이드러너는 영화 시리즈로, 「블레이드러너2049」(드니 빌뇌브, 2017)는 영화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2020년 2월 기준)

이 시리즈의 가장 처음은 「블레이드러너」 (리들리 스콧, 1982)이다. (이 영화만 해도 원작, 감독판, 파이널컷으로 세 버전이 존재하는데, 파이널컷 버전을 가장 추천한다.) 그리고 2017년에 마지막 영화가 나온 것이다. 이 두 영화의 시간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린 것들이 프리퀄 단편 3개이다. 이 단편 3개는 유튜브에 올라와 있으니 지금 당장 볼 수 있다. 이렇게 글로 써보니 조금 복잡한 것 같은데, 시간 순서대로 보고 싶다면 다음과 같이 보면 된다.

 

1. 「블레이드러너」 (리들리 스콧, 1982)

2. [블레이드 러너 2049] 프리퀄 단편 '블레이드 러너 2022'

3. [블레이드 러너 2049] 프리퀄 단편 '블레이드 러너 2036'

4. [블레이드 러너 2049] 프리퀄 단편 '블레이드 러너 2048'

5. 「블레이드러너2049」 (드니 빌뇌브, 2017)

 

 

원작 소설

이 영화 시리즈의 원작은 사실 따로 존재한다.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원작인만큼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을 것을 가장 추천한다.

 

 

출처 : 알라딘

 

 


이 글에서는 거의 인간의 존재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그렇게만 해석하기에는 크게 아쉽다. 특히 앞서 말한 영화 시리즈와 원작 소설을 읽고나면 더욱 그러하다. 긍정적인 것부터 부정적인 것까지 이야기할 것들이 꽤 많다. 여성을 다루는 방식, 일본 문화에 대한 표현 등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 해석할 수 있는 작가와 그 사회의 가치관까지.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영화이긴 하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는 점에서 한 번쯤은 볼 것을 추천한다!

 

※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SF’ 판타지 ‘SF&판타지로 통합하여 사용함을 밝힌다. 이는 SF와 판타지가 엄밀히 말하면 차이가 존재하나, 지금의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일 즉, 불가능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출처 : 알라딘

 

 

누군가 내게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첫 번째로 ‘SF&판타지를 이야기한다. 소설과 영화를 가리지 않고, SF&판타지라면 작품의 완성도에 상관없이 대부분 즐겁게 볼 정도로 좋아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서던리치:소멸의땅」, 「해리포터」, 「더기버:기억전달자」 등을 보았다. 어느 순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왜 ‘SF&판타지라는 장르에서 매력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름의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이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내가 사는 이 세계가 아는 것보다 더 멋지고 흥미로운 세계이길 바란다.

미국의 출입금지구역에 외계인이 산다든지, 마법사들이 정체를 숨기고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든지 등의 소문은 꽤 많은 사람이 들어봤을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아직도 참 거짓이 밝혀지진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소문들에 관심을 갖는다. 이는 만약 그것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자신도 다른 행성에서 살기, 순간이동하기, 빗자루 타고 날아다니기 등 많은 일이 가능해지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그렇다면 삶이 얼마나 더 재미있어질까. 그런 상상들이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다른 관점에서 현실의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예를 들어볼 수 있다. ‘루이즈 뱅크스 헵타포드 B’라는 언어의 비음운적인 성격을 수화로 예시를 들어 설명한다. 글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사고를 한다는 것. 이 부분을 읽었을 때, ‘헵타포드 B’라는 언어를 이해하는 동시에 수화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단순히 입으로 하는 소리 대신 손동작으로 하는 언어 정도로만 생각했다면, 이를 읽고 나서는 그림으로 사고하는 언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화가 새로우면서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처럼 SF&판타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의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이해를 돕는 동시에 현실의 것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가까이에서 보는 것과 멀리서 보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특히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테드 창은 현실의 것으로 자신의 상상을 설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느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알 수 있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물을 뒤집어쓴 개가 몸을 후드득 하고 흔들어 털가죽에서 물을 떨궈내는 소리를 엇비슷하게 연상시켰다.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이 문자를 보았을 때는 초서체로 그린 기상천외한 사마귀들의 집합처럼 보인다.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사실 소설의 내용이 굉장히 과학적이면서도 추상적이라 과학적 지식이 많이 부족한 나로서는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 그런데 부분마다 등장하는 이러한 비유들이 아! 하고 확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SF&판타지를 쓸 때, 가장 고민하는 것 중 하나는 나만 아는 이 세계를 독자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이다. 그 점에서 테드 창은 배울 점이 많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사실 원작 소설을 보기 전에 영화 「컨택트」(드니 빌뇌브, 2016)를 먼저 봤었다.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냈을까. 이 이야기를 생각해낸 사람은 글 쓰는 데 머리 좀 아팠겠다.’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에 와서 원작 소설과 뒤의 인터뷰를 읽어보니 이런 사람이니까 이런 글을 썼구나 싶었다. SF&판타지의 매력과 작가의 역량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새벽이다. 글 쓰기 참 좋은 시간이지만, 글을 쓰지 않으려 했던 시간. 자야겠다는 생각은 있으나, 눈꺼풀은 감을 생각을 하지 않아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관심도 흥미도 없는 글과 그림들을 슥슥 훑었다. 그러다 유튜브에서 '지친 이들을 위한 우울한 노래'(아마도 그런 제목의)를 눌렀다.

 

 

by. go_mill

 

 

 

 


요즘 나는 어떠했었지. 1월에는 바쁘게 영어학원을 다녔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2월 5일. 달력을 보니 1월이 지난지는 고작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작'의 시간동안 나의 하루는 절벽에서 추락하듯 달라졌다. 영어학원을 다녔을 때는 학원을 갔다가. 몸이 버티지 못해 잠깐 잠을 자고. 일어나자마자 과제를 하고. 그러다 새벽 3시쯤이 되면 몸이 버티지 못해 과제를 다하지 못하고 다시 잠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 8시에 벌떡 일어나서 학원을 가고. 뭐 그런 하루하루였다.

 

그렇게 1월을 '겨우' 살다가 2월이 되었다. 아침 8시쯤 잠에 들고. 12시에 일어나 아침겸 점심을 먹고. 다시 자고. 저녁 6시쯤 저녁을 먹고. 그리고 침대에 누워 다시 아침 8시까지 누워있다가 잠에 든다. 일주일도 안되는 시간이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엄마는 제발 좀 자지 말라고. 그만 자라고. 내게 다그쳤다.(진짜로 다그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자는 거 가지고 눈치 주지 말라고. 왜 쉬는 것도 못하게 하냐고. 나름 가볍게 넘겼다.(그렇다. 나는 불효자다.)

 

어제처럼 그리고 어제의 어제처럼 침대에 다시 누워있다가. 화장실에 가는데 허리가 아팠다. 허리를 구부리기가 힘들고 몸이 굳은 느낌이 났다. 아. 엄마 말이 맞았다. 나는 그만 자야한다. 그만 누워있어야 한다. 하지만 침대에 다시 붙자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머릿속에서 이런 저런 소리가 맴돌았다.

 

"싫어. 눕고 싶어. 쉬고 싶어."

"아냐. 일어나자.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어."

"왜. 나 진짜 힘들어. 제발. 혼자 그대로 냅둬줘."

 

그러다 문득. 아. 내가 힘든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때 핸드폰에서는 '지친 이들을 위한 우울한 노래'가 흘러 나왔다.

 

 

 

 


나는 내게 물었다.

 

"너 요즘 어때. 괜찮아?"

"... 아니. 글쎄. 그냥. 아무것도 안될 것 같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사람 숨소리만 들어도 마음 속에서 생채기가 날 것 같아. 별일이 없는 것 같는데. 나도 내가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래."

 

번아웃 증후군. 아무 곳이나 검색해보면 한 두문장의 사전적 정의가 나온다. 두 글자로 간단하게 말하면 '지침'. 어느 순간부터 나는 끝없이 반복되는 번아웃에 시달렸다. 지쳤다가. 해야 하기 때문에 일어나서 억지로 무언가를 하다가. 다시 버티지 못해 번아웃을 하다가. 다시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고. 그것이 반복될수록 그 주기는 짧아졌다. 그리고 억지로 일어나는 것은 더욱 힘겨워졌다.

 

머릿속에서는 가장 오랫동안 나를 이끌어왔던 엄격한 목소리가 이러면 안된다고. 해야할 것들이 눈앞에 쌓여있는데 다시 일어나라고 외쳤다. 하지만 반항심인지 번아웃인지 모를 것 때문에 몸이 머리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정말 머릿속에서 들리는 그 엄격한 목소리가 정말 내 목소리일까하는 생각이 의심이 들었다. 꼭 그걸 해야 하나. 정말 내가 그걸 원하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러다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태가 오래가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나는 뭘 해야하지. 방법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벌떡 일어나서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사실 나는 나를 꺼내서 보여주는 일에 굉장히 서툴다. 잘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인터넷 상에서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 오랫동안 갈망하면서도 망설였다. 뭔가 엄청 계획적이어야하고. 괜찮아야하고. 그래야할 것 같았다. 나는 서툰 사람이니까. 라는 변명으로 지금까지 써오지 않았다. 그런 내가 노트북 키보드를 타닥타닥 누르고 있는 이유는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달라지는 것이 지금의 숨막히는 기분에서 조금이라도 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획적이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뱉어내보고 싶다.

 

어쩌면 이곳에서 쓰는 글들은 친절하지 않은 글일지도 모른다. 어느순간 마음을 바꿔 한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지금의 나같은 누군가가 나의 글들을 읽고. 저런 인간도 있구나. 나도 어쩌면 괜찮아질 수 있지 않을까. 라며 아주 조금. 정말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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